[그림이 있는 에세이] 마음의 정원 / 하태임, 화가

추위를 많이 느끼는 나는 유난스럽게 봄을 기다려서 나무들이 보내는 신호에 온 마음을 쏟는다. 계절은 마법처럼 무색풍경에 여리고 순한 연두색 새순을 수놓는다. 아침마다 접하는 뉴스에는 코로나19 백신 소식은 요원하고 여전히 얼어붙은 세계 곳곳의 우중충한 신음만 가득하다. 따뜻한 물 한 컵을 손에 들고 창문을 통해 하늘과 대기의 분위기를 살핀다.

작업실로 내려가 앞치마를 허리에 질끈 묶으며 어제 펼쳐놓은 미완의 작업을 훑어본다. 하얀색 붓질이 8회 정도 칠해진 곡면이 약간 아쉬워 보인다. “그래 하얀색을 완성하자.” 12cm의 붓을 물에 담가 붓결을 모아주고, 개수대 위에서 붓을 세게 휘둘러 물을 빼낸다. 촉촉한 붓을 하얀색 물감이 알맞게 개어있는 물감 통에 넣어 여러 차례 담금질하고, 붓결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후우욱숨을 가늘게 내쉬며 붓을 미끄러뜨린다. 내 몸은 하나의 축이 되고 팔은 넓게 호를 그리며 붓을 지지할 뿐이다. 물감을 올리는 행위가 시작되면 와글와글 시끄럽던 머릿속이 비로소 무음이 된다. 얇게 올려진 물감은 두 시간 정도 지나야 물기가 마른다. 같은 동작을 통해 물감이 또 한 번 올려진다. 이전 붓질보다 색이 약간 드러난다. 이렇게 칠해진 물감이 마르면 깨끗이 빨아놓은 붓에 다시 물을 축이고 물감 통에 붓결을 고르며 똑같은 절차가 진행된다.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가 수차례, 많게는 십여 회 더해지면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기도 한다. 하나의 곡면이 완성되기 위해 나는 가끔 내 자신이 실을 토해서 자신의 집을 만드는 누에고치가 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색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기도 하지만 붓질과 붓질 사이에 생기는 물리적 시간은 다른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틈새의 시간을 제공한다. 잠시 책을 볼 수도 있고 정원에 나가 작년에 심은 장미의 줄기를 살필 수도 있다. 양평으로 이사 와서 두 번째 맞는 봄이라 이 틈새의 시간에는 종종 정원에 나간다. 수분이 빠져나간 식물의 줄기를 만져보고 흙 속에 손가락을 넣어 대지의 온도를 느껴보기도 한다. 정원 한쪽에 수북이 덮여있는 낙엽들을 걷어내니 작년에 심어놓은 채송화의 물을 머금은 통통한 초록 줄기들이 인사를 건넨다.

메마른 대지, 마른 풀, 무색 자연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꿈틀대며 생명을 펼치고 있는 작은 식물들이 정말 반갑다. 정원의 남쪽에는 30년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수령만큼이나 키가 크고 많은 가지로 규모도 꽤 있어 정원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다. 그 이유로 나는 이것을 베어버리자고 남편에게 심심치 않게 말해왔다. 그런데 얼마 전 낙엽을 걷어내는 일을 하면서 그 성가시던 은행나무의 낙엽이 두툼한 담요가 되어 작은 화초들을 덮어주며 보호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냉혹한 계절, 생명이 다한 듯이 보인 자연에서 공존하며 자기 삶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작은 현상들이 정원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작업실로 돌아와 완성된 하얀색 반곡면 위에 칠할 색을 준비한다. “밝은 노란색을 칠해볼까?” 아니면 여린 새순을 닮은 연두색을 올려볼까?” 노란색은 어린 시절 머리카락을 사르륵 넘겨주는 엄마의 무릎베개를 하고 잠깐 잠들었을 때 느꼈던 망막에 어리던, 심리적으로 가장 평온하고 낙천적인 색이다. 연두색은 긴 겨울이 봉인 해제된 듯 밀려오는 따스한 공기처럼 위로와 편안함을 준다. 색을 올리고 물감이 마르기를 반복하면서 색이 익어가기를 기다린다. 잠자리 날개와 같이 얇은 시간이 층층이 쌓인다.

 

 

어느덧 나의 정원은 찬란한 벚꽃도 지고 새로운 색채들로 충만해질 시간이다. 내가 정원에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모습을 찾아보는 건 점차 선명해지고 다양해지는 색채를 만나고 싶어서이다. 계절, 날씨와는 무관하게 작업실에서 펼쳐내는 화사한 붓질들이 보는 이의 마음의 정원에도 다채로운 색채의 생명으로 가득해 그 안에서 위로받고 쉼을 얻기를 희망한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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