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자국] 글로 내디딘 나의 첫걸음 / 임희정, 前 MBC 아나운서·MC

37년째 생을 살아오며 나에게는 무수히 많은 처음이 있었다. 첫걸음마, 첫 입학, 첫사랑, 첫 취업, 첫 월급 등등. 일과 사랑, 관계의 영역에서 수많은 시작을 겪으며 설레고 당황하고 뿌듯해하며 성장해왔다. 그 과정에서 실패도 좌절도 성공도 후회도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그 처음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처음을 통해 지금이 된 존재들이다.

그중 2019년의 10. 내 인생 서른여섯 번째 해의 가을에 나의 첫 책이 나왔다. 그 어떤 처음보다 의미 있고 벅찬 첫 경험이었다. 나는 그 책에 내 이름과 함께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 석 자를 함께 새겼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작지만 위대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책이다.

10년 차 아나운서인 나에게 사람들은 물었다. 말을 하던 사람이 어떻게 책을 내게 되었냐고. 답은 간단했다. 10년 동안 말을 업으로 하며 수많은 말들을 내뱉었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용기 내 글로 썼다.

평생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온 아버지와 평생 주부로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뒷바라지를 해온 어머니.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생각하면 생각이 많았다. 나의 부모 앞에는 항상 가난과 무지가 무늬처럼 새겨져 있는 듯했다.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투정으로 시작해, 성인이 되고 나서는 노동자를 바라보는 사회 속 시선에 대한 궁금증, 원망, 슬픔 같은 감정들이 늘었다. 무엇보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그 생각들은 나에게 상처가 되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나를 환대해 주고 환영해 주었지만, 그만큼이나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의 부모와 배경을 궁금해하는 질문들도 많았다.

당연히넉넉한 집안에서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자랐고, 그런 부모님은 고학력자에 대단한 직업을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기대치들. 나는 그 시선이 항상 부담스러웠고, 그 시선에 맞추려 부모를 감추고 거짓으로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괜찮은 자식이, 건강한 딸이, 온전한 내가 아니었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말하지 못해서. 묵혀두고 답답했던 마음들을 하나둘 꺼내어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나는 왜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는지, 감추어야 했는지, 말하지 못했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물으며, 해답보다는 나 먼저 내 부모를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해 글을 썼다.

누군가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 사정이 있고, 아픔이 있고, 곤란이 있다. 친밀함과 관계와는 별도로 서로를 잘 모르고 이해의 범위는 좁을 수밖에 없다. 내가 글을 쓰기 전까지 보통의 아나운서들은 소위 엄친아엄친딸로 그려졌다. 자연스럽게 그것은 기준이 되었고, 그 선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은 좌절해야 했다. 직업을 떠나 대부분의 기준이 그렇게 형성된다. 그러니 세상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아져야 한다.

책을 내고 수많은 독자들이 말해주었다. ‘저도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며 살았어요.’ ‘친구들과 비교해 가난한 형편과 초라한 부모를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고해 성사와 같은 이야기들을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들려주시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기에, 부모님의 이야기를 쓴 첫걸음이 많은 사람에게 가닿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쓸 용기가, 더 잘살아 볼 삶의 의지가 생겼다. 썼을 뿐인데, 나는 부모를 인정하게 되었고 그 삶이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했던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한 내가, 겨우 자식이 되어가는 듯하다.

 

 

앞으로도 나에게는 또 다른 처음이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부족할 것이고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처음은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채워가고 나아지기 위해서.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어설프고 용기가 필요한 생의 첫 순간들을 기꺼이 기뻐하고 맞이해야 한다. 그런 첫걸음들을 모아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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