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만남의 순간들 / 김규연, 피아니스트

그날 유난히 잠에서 일찍 깨어났다. 아마도 낯선 잠자리가 주는 생경함이 나를 깨웠으리라.  900년이 넘었다는 그 성은 벽에서, 바닥에서, 그리고 천장에서 그 긴 세월을 품은 듯이 기이한 냄새가 났다. 

수도사가 흘렸던 와인이 나무 바닥에 깊이 스며들어 배인 냄새, 고서들의 케케묵은 오래된 종이 냄새, 기나긴 세월을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온기가 배인 냄새, 그리고 그 많은 죽음의 냄새 등등…. 이토록 겹겹이 쌓인 세월의 냄새는 낯선 방문객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한 생경함을 품고 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의 새벽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매분마다 달라지는 색감, 그 마술같이 변하는 풍광 속에서 천 년 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날이 밝아짐에 따라 아침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천 년 전의 사람들도 그때의 공기도 안개 뒷자락으로 점점 사라졌다. 그렇게 세월의 결은 우리와 함께 숨 쉰다. 

낯선 마을에서 홀로 맞이하는 새벽은 언제나 두근거린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11월 초의 새벽 공기에 덮인 마을은 아직 고요했다. 내 방 창문으로 보았던 풍경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싶었다. 40분 남짓 걸었을까? 점점 내가 머물고 있는 성이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아득한 과거처럼… 아련한 그때 그 순간들처럼… 그렇게… 멀리 보였다.

시끄러웠던 마음속이 점점 비워지면서 그 공간을 슈베르트의 즉흥곡 작품 번호 90의 3번이 채우기 시작했다. 항상 사랑하는 곡이었지만, 이날따라 왠지 더욱 더 눈물겹고 아득하게 다가왔다.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마을로 다시 돌아오며 나의 모든 정신이 맑아졌다. 세포 하나하나의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슈베르트는 굉장히 개인적이고 가장 그리워하는 순간에 항상 있었다. 그의 음악에는 가슴 저미는 순진무구함이 담겨있다. 미소와 눈물의 공존, 초자연적인 향수가 배어있다. 운명을 거스르며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것이 아무리 가혹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절망하거나 냉소 짓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슬픔이 있다. 순간, 나의 가슴은 촉촉해졌다.

빵 굽는 냄새, 진한 에스프레소의 향기가 정겨운 마을로 돌아왔다. 아침으로는 카푸치노, 치아바타와 진한 향의 올리브오일, 토양의 향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토마토, 그리고 프로슈토를 먹었다. 주인아저씨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뉴욕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아저씨는 작년에 뉴욕에 왔었다며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쭉 늘어놓았다. 처음 온 낯선 마을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위로받는다. 따뜻했다. 

다음날 오후, 몬테풀치아노를 떠나 작은 연주회를 하기 위해 꼬모(Como)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연습하며 집중했지만, 어제 새벽에 받았던 그 느낌이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찾던 ‘무엇’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헌신…. 시간이 흘러 나중에 그 순간을 되돌아보며 반추해보니, 그것은 바로 음악에 대한 헌신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인생의 어떤 중요한 만남의 순간은 사소한 일상 속에서 찾아온다. 나는 그날 새벽, 음악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갈망, 예술을 향한 나의 사랑, 그리고 예술을 위해 나의 인생을 걸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낀 것이었다. 

시간의 결을 느꼈던 낯선 곳에서의 새벽이 준 영감은 나의 가슴에 진한 파문을 일으켰다. 왜 그랬을까? 문득 패티 스미스(Patti Smith, Patricia Lee Smith)의 말이 생각난다.

“영감은 예기치 못한 질량이며 은닉의 시간에 급습하는 뮤즈다.”

 

 

*1985년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뉴잉글랜드음악원, 커티스음악원 졸업. 제네바 콩쿠르 최연소 특별상(2002),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2010), 클리블랜드 국제 피아노 콩쿠르 모차르트상(2011) 등 수상. 現 서울대학교 기악과(피아노전공) 교수.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 본 콘텐츠는 발행사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재배포 등을 금합니다.


포스트 공유하기     
월간에세이 Essay

월간에세이 Essay

정기구독 상세보기